문화 감상/영화 감상

친절한 찬욱씨 표 영화 <아가씨>

셀디 2016. 6. 2. 19:49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칸의 남자, 박찬욱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칸을 기대케 했지만 아쉽게도 수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번외편인 벌칸상 수상이 폐막식 이후에 들려왔다. 벌칸상은 폐막 이후 미술,음향,촬영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품에 주는 상이다. 정확히는 미술감독인 류성희 감독이 수상을 하게 되었다. 벌칸상도 한국영화 최초라 하니 그래도 칸의 남자 박찬욱이 무언가 하나 건져온 것은 확실하다. 어찌되었든 박찬욱의 <아가씨>는 칸에 진출한 것만으로 이미 국내에선 충분한 홍보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경쟁부문에서 주요 상이라도 더 탔다면 더욱 크게 이슈가 되었겠지만 칸에서 들려온 여러가지 소식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개봉 첫날 청소년 관람불가 타이틀을 단 작품으로는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를 거뒀다고 한다. 개봉 전 국내 시사를 통한 일반관객들의 좋은 평들도 시너지를 더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박찬욱 필모그래피에서 비교적 대중적인 코드가 많은 작품이다. <JSA>같은 초기 작품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은 언제나 대중들의 코드와 빗겨나가 있었다. 흥행에도 성공하고 대중적 인기도 얻었던 <올드보이>도 사실 어떻게 잘 맞아떨어져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코드를 가진 영화는 아니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불친절한 작품들을 만들어오던 그였다. 하지만 <아가씨>는 불편은 할지언정 불친절하진 않다. 아주 명쾌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는 영화이다. 불편한 정도도 최근 그의 작품들에 비하면 많이 희석된 수준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친절한 찬욱씨를 기대해도 좋다는 것이다.



백작 역의 하정우와 히데코 역의 김민희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라는 원작을 갖고 있다. 난 사실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듣기 이전에 이 원작에 대한 존재도 알지 못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올드보이>처럼 초반 설정만 제외하면 많이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 또한 박찬욱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작의 틀은 빌려오지만 뛰어난 각색으로 인해 원작과 본인의 작품 모두 해를 입히지 않고 영리하게 작품을 완성시키는 재주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 원작이 있는 경우 각색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 원작에 민폐를 입히는 작품이 많음을 감안하면 왜 그가 이 부분에서 좋은 평을 들을 수 있는지 납득이 간다.



박찬욱은 김태리라는 젊은 유망주를 발굴해냈다.


영화는 총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영화의 흐름은 하정우와 김태리의 관계, 김태리와 김민희의 관계, 김민희와 하정우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관계의 얽힘을 각 장이 진행되면서 점진적으로 풀리는 과정을 그린 것이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유기적이면서도 어렵지 않게 그려지고 있어 오락적 쾌감 또한 나쁘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가는 것 보다는 각 인물들 간의 감정의 퍼즐을 맞추는 재미가 더욱 컸다. 사건의 흐름은 바로 인물들 간의 감정선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달랐다면 전혀 다른 결말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조진웅은 생각보다 분량이 많지 않았는데 뒤틀린 남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김민희는 이제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배우중 하나로 발돋움 하였다고 본다.


이 작품을 논할 때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큰 축인 김민희와 김태리가 그러하다.(하정우와 조진웅이 못한 건 아니지만 그들이 맡은 역할 자체가 큰 무언가를 빼내기 어려운 역할들이었다고 본다) 김민희는 알게 모르게 나날이 발전하는 연기력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다져오던 배우이다. 아마 현재 유명 감독들의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홍상수와 박찬욱을 거쳤는데 앞으로 어떤 감독을 거치게 될지 기대가 되는 바이다. 그녀가 맡은 히데코 즉 '아가씨'는 다층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그녀의 표정과 말투, 몸짓만으로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런 사소한 하나하나에 상대 배역과 관객 모두 납득이 가도록 해야하는 연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그 쉽지 않은 것을 김민희는 해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최고 명장면으로 꼽는 낭독회 장면은 낭독회에 참석한 남자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혼까지 쏙 빼놓을 정도로 호소력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순수 일본어로만 연기하는 부분인데 태어나서 일본어가 이렇게 아름답고 섹시하게 들려본 건 처음일 정도였다. 김태리도 신인 답지 않은 탄탄한 연기력으로 김민희와 쌍벽을 이룰만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있자니 청춘물에서 시대극까지 다 소화가 가능할 정도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둘의 연기적 시너지가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빛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벌칸상 수상과 관련하여 이 작품의 미장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올드보이>부터 항상 미장센은 두말 하면 입아플 정도로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미장센 하면 국내 대표 감독으로 떠오를 정도로 미장센에 대한 집착이 강한 감독이다. 그리고 항상 그와 함께 해온 류성희 미술감독은 그만큼 박찬욱의 취향을 잘 맞춰줄 수 있는 미술감독이라 볼 수 있다. 그러고보니 박찬욱이 류성희를 만난 시점인 <올드보이>부터 그런 독보적인 미장센을 구축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여담으로 미국판 <올드보이>는 여러모로 원작에 비해 부족한 작품이었는데, 가장 큰 차이가 그 미장센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그 독특한 미술적 색감이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니 평범한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박찬욱의 작품에서 미장센이 차지하는 영역은 크다는 것이다. 이제 심지어 그 미장센만 봐도 박찬욱과 류성희의 조화구나란 걸 알아챌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이 영화의 프레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이끌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벌칸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과 박찬욱 및 제작진에 축하를 보내며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