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감상/영화 감상

크리스토퍼 놀란의 초기작 <인썸니아>를 감상하다

셀디 2016. 6. 27. 12:40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내에선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초기작 <인썸니아>를 이제야 감상했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메멘토>의 바로 다음 작품이다. 아무래도 이 두 작품은 한 개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스릴러라는 점에서 초기 그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심리를 비트는 연출과 편집은 <인썸니아>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모그래피에선 이 작품이 가장 과소평가 받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편처럼 퍼즐 조각을 맞추는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자극적인 요소를 다룬다거나 스릴러가 주는 쾌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죄에 대한 한 개인의 불안한 감정에 모든 걸 몰빵하는 이야기였다. 나도 과연 살인범은 누구이고 왜 살인을 저질렀으며 어떻게 그를 잡을까 하는 시점에서 영화를 접했으나 생각과 다르게 영화가 흘러가는 것에 살짝 실망을 하기도 했다. 한적한 마을에서 10대 여고생의 발가벗은 변사체가 발견하고 베테랑 형사가 투입된다는 설정만 보면 전형적인 살인사건 수사 추리물이 될것 같지 않은가?

 

 

사실 이 영화에서 범인 자체는 중요한 것임이 아님을 포스터부터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포스터에 쫓는 형사와 범인이 모두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초반이 지나고 나면 어떤 배우가 범인으로 나올지 짐작이 갈 것이다.

분명 중요한 배역인데 초반엔 나오지 않으니.

 

 

설정상 미모의 여고생이라 하는데 실제 영화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굉장히 짧은 형식의 편집을 빌었으며 익스트림 클로즈업 등으로 얼굴을 일부분만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시체 스틸을 보니 미모의 여고생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실 이건 중요한 요소는 아닌데 스틸을 보다 보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알파치노는 이 연기를 할 때 이미 연세가 꽤 드신 상태였는데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중간에 범인을 추격하는 과정이 가장 그러한데 보는 내가 조마조마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 위태위태한 모습을 놀란 감독은 잘 활용하였고 실제 그 장면에서 주인공은 위기에 처한다.

 

 

현지 형사로 근무하는 힐러리 스웽크, 주인공을 동경하는 년차 얼마 안되는 형사이지만 그만큼 총명하고 떼가 묻지 않은 순수한 경찰로 등장한다. 그것은 반대로 주인공은 베테랑 형사이지만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라는 걸 부각시켜준다. 그렇다고 부패 형사처럼 그려지진 않는다. 알파치노가 연기한 도머 형사는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실수와 그 실수가 어떤 파급을 불러올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범인으로 나오는 로빈 윌리엄스, 보통 선량한 캐릭터를 많이 맡았던 그였던지라 다소 몰입이 되지 않기도 했다. 연기가 분명 좋았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렇게 작품을 통해 다시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얼마전 백야에 대한 뉴스 기사를 읽어보았다. 실제 그런 백야 현상 때문에 밤이 되어도 사람들이 자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백야현상이 강한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알래스카이다. 해가 지지않는 그곳,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주인공은 불면증의 원인을 단순 백야현상에 덮어씌우지만 그를 옥죄고 있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실제 그를 잠못이루게 한 것이라는 연출의 의도가 좋게 다가왔다. 백야라는 상징적인 현상, 불안감에 시달리는 범인과 형사의 묘한 대구가 놀란의 뛰어난 심리 연출로 처음부터 끝까지 묘한 긴장감을 남기는 영화였다. 분명 놀란의 다른 작품들 보다 지루한 편이긴 하나, 그의 탁월한 심리 연출 덕분인지 관객들도 주인공이 느꼈던 그 불면증의 체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수준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라는 너무나 적절한 속담이 생각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치 이 영화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몸을 쭉 펴고 세상 걱정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건 소소해보여도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